아킬레우스가 거북이와 달리기를 한다. 빠른 영웅과 느린 거북이의 승부라니, 시작하기도 전에 결과를 알 것 같다. 그래서 거북이에게 얼마쯤 앞에서 출발하게 해 주었다고 하자. 그래도 아킬레우스가 곧 따라잡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상한 설명을 꺼낸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점까지 달려가는 동안, 거북이도 조금 앞으로 간다. 그곳까지 다시 쫓아가면 거북이는 또 조금 앞에 있다. 이 설명을 계속 따라가면, 눈앞에서는 뻔히 일어날 일이 말속에서는 끝내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 빠른 사람이 느린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니, 어디서부터 이상해진 걸까?
문단 자료[1]

왜 당연한 운동을 문제 삼았을까
이 질문을 남긴 사람은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 엘레아의 제논이다. 엘레아는 오늘날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계 도시로, 뒤에 벨리아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지금 남은 유적을 보면 그의 질문도 한때 사람들이 걷고, 만나고, 생활하던 곳에서 나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제논의 책은 온전히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읽는 운동 역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약과 후대의 주석을 통해 전해졌다. 그러므로 익숙한 경주 이야기를 읽을 때에도, 오늘날의 자세한 장면과 숫자까지 제논이 그대로 써 놓았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제논의 질문 뒤에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며, 변화와 운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그와 가까웠던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철학시에서 ‘있는 것’을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논했다. 그에게는 무언가가 새로 생겼다면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겼다는 설명이 성립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변화와 쉽게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서 제논은 파르메니데스를 조롱하던 사람들에게 대응하려고 글을 썼다고 말한다. 여러 사물이 존재한다는 상대의 생각도 끝까지 따져 보면 곤란한 결과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다만 그 대목은 여러 사물의 존재에 관한 논변을 설명한다. 아킬레우스 역설이 만들어진 구체적인 경위까지 알려 주지는 않는다.

이 배경을 알고 나면 ‘그냥 달려서 보여 주면 되지’라는 반응 다음에 할 일이 생긴다.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과, 움직임이 불가능하다는 논증의 어느 연결이 잘못되었는지 밝히는 일은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피스트적 논박』에서 제논을 예로 들어 이 차이를 짚었다. 우리는 앞의 문장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문장에도 동의했는데, 마지막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 앞에 서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동의했던 문장들을 다시 펼쳐 보는 일이다. 어떤 근거에서 어떤 주장이 나왔는지, 그 둘을 잇는 이유가 충분한지 살펴보자.
문단 자료[5]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00미터 안에 끝없이 많은 구간이 있다
먼저 거북이를 잠깐 쉬게 하고, 혼자 100미터를 달리는 장면을 보자. 도착하려면 우선 절반인 50미터 지점을 지나야 한다. 그다음에는 남은 50미터의 절반, 곧 25미터를 더 가야 한다. 이제 75미터 지점이다. 다음에는 12.5미터를 더 가서 87.5미터 지점에 이른다. 남은 거리의 절반을 잡는 일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 이것이 여기서 살펴볼 이분법의 모습이다. 주자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 달린다. 한 번의 달리기를 우리가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이런 의문이 생긴다. 도착 전에 지나야 하는 구간이 끝없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다 지나갈 수 있을까? 어느 구간을 지나도 다음 구간이 남아 있다면, 결승선에 도착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 것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검토할 연결은 ‘지나야 할 구간이 무한히 많다’에서 ‘지나는 데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곧바로 따라오는지 살펴야 한다. 무한이라는 같은 단어가 등장하지만, 한쪽은 구간의 개수를 말하고 다른 쪽은 시간의 양을 말한다.
문단 자료[7]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왜 늘 한발 늦게 도착할까
이제 두 주자의 경주로 돌아오자. 고대 그리스의 경기 우승 상품이었던 아래 항아리에는 힘차게 달리는 선수들이 그려져 있다. 빠른 사람이 먼저 도착한다는 익숙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제논의 아킬레우스 논변은 바로 빠른 주자가 느린 주자를 따라잡는 상황을 문제 삼는다. 계산을 쉽게 하려고 아킬레우스는 초속 10미터, 거북이는 초속 1미터로, 거북이가 100미터 앞에서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정하자. 둘은 같은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일정하게 움직인다. 이 속도와 거리는 설명을 위해 정한 가상 경주의 조건이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점인 100미터 지점에 도착하려면 10초가 걸린다. 그동안 거북이는 10미터를 더 가서 110미터 지점에 있다. 아킬레우스가 그 10미터를 더 달리는 데는 1초가 더 걸리고, 거북이는 그사이에 1미터를 더 간다. 다시 그 1미터를 달리는 0.1초 동안 거북이는 0.1미터 앞서 나간다. 100미터, 10미터, 1미터, 0.1미터… 간격은 줄지만, 이렇게 골라 본 장면에서는 거북이가 언제나 앞에 있다. 이 장면들을 이어 붙이면 따라잡는 순간이 끝없이 미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아무 때나 경주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매번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이전 위치에 도착한 순간’을 골라서 보여 준다. 그때마다 거북이가 조금 앞에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선택한 모든 장면에서 앞선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경주의 모든 시각에 앞선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모든’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범위가 달라졌다. 이 의심을 확인하려면 장면을 하나 더 보태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장면들이 전체 시간 속 어디에 놓여 있는지 보아야 한다. 경주 장면 옆에 시계를 놓을 때가 되었다.
문단 자료[6]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간을 셀 때 시간도 함께 보자
끝없이 많은 일을 한다고 해 보자. 한 번에 1초씩 걸린다면 총시간은 끝없이 늘어난다. 하지만 1초, 0.5초, 0.25초처럼 매번 절반의 시간만 걸린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처음 둘을 더하면 1.5초, 셋을 더하면 1.75초, 넷을 더하면 1.875초다. 더하는 횟수는 계속 늘어나지만 누적 시간은 2초에 가까워진다. 항목이 몇 개인지와 그 항목들의 크기를 더한 값은 서로 다른 문제다. 합의 유한성을 판단하려면 항이 줄어드는 비율도 확인해야 한다. 이 경주에서는 실제로 어떤 비율로 줄어드는지 확인해야 한다.
문단 자료[7]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00미터의 이분법에 시계를 붙여 보자. 주자가 초속 10미터를 유지한다면, 50미터를 가는 데 5초, 다음 25미터에 2.5초, 다음 12.5미터에 1.25초가 걸린다. 거리가 절반이 될 때 시간도 절반이 된다. 5 + 2.5 + 1.25 + …의 무한합은 정확히 10초다. 여기서 무한합은 끝없는 덧셈의 마지막 계산을 뜻하지 않는다. 앞에서부터 더한 누적값이 가까워지는 값을 뜻한다. 원하는 만큼 작은 오차를 정해도, 충분히 많은 구간을 더하면 10초와의 차이를 그보다 작게 만들 수 있다. 이런 관계를 ‘10초로 수렴한다’고 한다.
문단 자료[7]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가 남는다. ‘어느 구간에서든 조금 남는다면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도착하지?’ 맞다. 5초, 7.5초, 8.75초, 9.375초… 이 목록에는 마지막 중간 시각이 없다. 그러나 이 시각들은 모두 처음부터 10초 이전의 시각으로 골라 놓은 것들이다. 이 중간 시각들의 상태와 10초의 상태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주자가 10초까지 계속 같은 속도로 달린다고 정했다. 그 조건에서 10초 동안 간 거리는 정확히 100미터다. 마지막 중간 지점 없이도 도착점은 정해진다. ‘아주 조금 남았으니 도착한 셈 치자’는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문단 자료[6]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다. 그가 거북이의 직전 위치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10초, 1초, 0.1초, 0.01초…이고, 이 합은 100/9초, 곧 11.111…초다. 더 익숙하게 확인할 수도 있다. 두 주자의 간격은 매초 10 − 1 = 9미터씩 줄어든다. 처음 간격 100미터가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0 ÷ 9초다. 이때 둘은 아킬레우스의 출발점에서 1000/9미터 떨어진 곳에서 만나고, 그 뒤에는 아킬레우스가 앞선다. 앞에서 골랐던 10초, 11초, 11.1초는 전부 이 만남보다 이르다. 선택한 중간 장면 전체와 실제 경주의 전체 시간은 서로 다른 범위다.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질문에 더 정확한 대답을 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거리와 함께 시간도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끝없이 나눌 수 있다는 것과 끝없이 길다는 것을 구별한 것이다. 후대에는 무한합과 극한을 다루는 수학이 더 정교해졌고, 특히 19세기 해석학은 ‘계속 가까워진다’는 말을 엄밀한 기준으로 다루게 했다. 이처럼 무한을 설명하는 방법이 정교해지면서, 제논의 질문에 답하는 기준도 발전했다. 합이 유한하다고 말하는 데서 나아가, 왜 그런지와 어떤 조건에서 그런지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질문이 끝났을까? 이번에 사용한 설명은 위치와 시간을 연속적인 수로 나타내고, 주자가 정한 속도로 계속 움직인다는 모형 안에서 성립한다. 그 안에서는 무한히 많은 중간 구간과 유한한 도착 시간이 모순 없이 함께 설명된다. 그러나 실제 공간과 시간도 모든 규모에서 끝없이 나눌 수 있는지, 온갖 무한한 작업을 현실에서 실행할 수 있는지까지 이 계산 하나가 정해 주지는 않는다. 철학적 질문은 여기서 다시 이어진다. 우리는 자연을 어떤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설명의 조건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제논의 문제를 읽는 재미는 익숙한 달리기에서 이런 물음까지 걸어 나갈 수 있다는 데 있다.
문단 자료[8]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100미터에 규칙 하나를 바꾸어 보자. 한 사람은 초속 10미터로 쉬지 않고 달린다. 다른 사람은 달릴 때의 속도는 같지만, 남은 거리의 절반 지점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1초씩 쉰다. 두 사람에게 표시한 중간 지점은 똑같이 끝없이 많다. 그런데도 도착에 필요한 시간은 같을까? 두 번째 사람에게는 이동 시간에 더해 1초, 1초, 1초…의 휴식이 쌓인다. 이 규칙을 계속 지키는 두 번째 사람은 어떤 유한한 시간 안에도 100미터에 도착할 수 없다. 어떤 설명에서 ‘끝없이 많다’는 말을 만나면, 무엇이 많아지는지부터 물어보자. 오늘의 경주에서는 구간을 세는 눈금 곁에 시간의 눈금을 함께 놓는 일이 필요했다.

그림 확대해서 읽기

확대한 그림은 좌우로 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