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태어나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아퀴나스는 중세 유럽의 철학과 신학을 잇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HUMANITY & PROOF · THOMAS AQUINAS / 08
책상 위의 전등이 켜져 있습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전선으로 전류가 흐르며, 전력을 공급하는 장치가 작동합니다. 우리는 불이 켜진 까닭을 여러 단계에 걸쳐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명을 계속 이어 가면 언젠가 다른 원인에 의존하지 않는 원인을 만나야 할까요?
13세기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을 신의 존재에 관한 논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주장은 흔히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니 맨 처음에 신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요약됩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실제로 따진 문제는 조금 더 정교합니다. 지금 어떤 결과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원인들이 서로 의존한다면, 그 원인들의 설명을 어디에서 완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약 122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274년에 세상을 떠난 도미니코회 신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나폴리에서 공부한 뒤 도미니코회에 들어갔고, 파리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가르치고 집필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면서, 경험 세계에서 출발하는 이성적 논증이 신학의 질문에 어디까지 답할 수 있는지를 따졌습니다.
그의 대표작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1260년대 중반부터 집필한 방대한 저술입니다. 제1부 제2문 제3항에서 아퀴나스는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다섯 가지 논증을 제시합니다. 이를 ‘다섯 길’이라고 부릅니다. 첫째 길은 운동과 변화, 둘째 길은 작용인, 셋째 길은 가능성과 필연성, 넷째 길은 정도의 차이, 다섯째 길은 자연의 질서에 초점을 둡니다.
이번 글은 둘째 길을 다룹니다. 흔히 ‘제일원인 논증’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아퀴나스는 첫째 길의 ‘최초의 운동자’와 둘째 길의 ‘첫 작용인’을 구별했습니다. 두 논증은 비슷한 구조를 지니지만 출발점이 다릅니다. 둘째 길의 원문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에 작용인의 질서가 있다는 관찰에서 시작합니다.
역사적 위치: 둘째 길은 오늘날 우주의 탄생 시각을 계산하는 과학 이론으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의 질서에 관한 철학적 논증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아퀴나스는 중세 유럽의 철학과 신학을 잇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수도회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적 질문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부 제2문 제3항에서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다섯 길을 제시했고, 둘째 길에서 작용인을 다루었습니다.
생애 마지막 시기까지 집필을 이어 갔습니다. 『신학대전』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중요한 문헌으로 읽힙니다.
어떤 결과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들의 관계는 어디에서 설명될까요?원전의 직접 인용이 아닌, 둘째 길의 질문을 현대 한국어로 재구성한 문장입니다.
먼저 무엇이 작용인인지, 무엇이 시간의 앞뒤와 다른 의존 관계인지 구별합니다. 그다음 자기 원인과 무한한 의존 계열의 문제를 살펴보고 전제에서 결론까지 연결합니다.
1 · 원인과 두 질서
어린이가 공을 굴립니다. 공이 움직인 원인을 묻는다면, 어린이의 손이 공을 밀었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손은 공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데 작용했습니다. 아퀴나스가 말한 ‘작용인’(causa efficiens,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은 이런 역할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원인’이라는 말로 읽어도 좋지만, 무엇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면 뜻이 정확해집니다.
원인을 찾는 일과 원인을 이름 붙이는 일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전등은 전기 때문에 켜진다’는 설명은 전기가 어떤 조건에서 공급되는지를 다시 물을 수 있게 합니다. 이어서 발전기, 배전망, 에너지원 같은 여러 대상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현실의 전력망은 복잡한 여러 갈래로 연결됩니다. 아래의 설명용 그림은 실제 전력망을 그대로 옮긴 모형이 아닙니다. 다른 것에서 작용 능력을 받는 관계가 무엇인지 보여 주기 위한 단순한 사례입니다.
실제로 어떤 결과에는 여러 원인이 함께 관여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더라도 아퀴나스가 주목한 질문은 남습니다. 어떤 원인이 스스로 작용할 힘을 충분히 지니지 못하고 다른 원인의 작용에 의존한다면, 그 의존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다음 두 이야기를 비교해 봅시다.
첫째,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요리법을 알려 주고,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아이에게 알려 줍니다. 할머니가 지금 곁에 없어도 어머니는 배운 방법으로 아이에게 요리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주로 시간의 앞뒤를 보여 줍니다. 앞사람이 과거에 역할을 마쳤어도 뒤사람은 계속 활동할 수 있습니다.
둘째, 손으로 막대를 밀어 막대 끝에 닿은 공을 움직인다고 생각해 봅시다. 막대는 손의 힘을 전달하고 공은 그 힘을 받아 움직입니다. 이 장면에서 막대의 전달 작용은 손의 현재 작용에 의존합니다. 손이 힘을 주지 않으면 막대가 그 힘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지금 작용이 성립하기 위한 의존 관계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물론 실제 막대에는 관성이나 다른 힘도 작용할 수 있으므로, 이 예는 다른 조건을 잠시 제외한 단순 모형입니다.
아퀴나스의 둘째 길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형태의 의존 관계입니다. 철학 연구에서는 이를 ‘본질적으로 질서 지어진 원인들의 계열’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첫 번째’라는 말은 반드시 가장 오래전에 있었던 사건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른 원인에게서 작용 능력을 빌려 오지 않는 근본 원인을 가리킨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우주가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더라도, 지금 관찰되는 결과의 원인 구조를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퀴나스 자신도 『신학대전』 제1부 제46문 제2항에서 세계가 시간적으로 처음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성만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길을 곧바로 ‘우주에는 첫날이 있다’는 주장으로 고쳐 쓰면 아퀴나스의 논점을 놓치게 됩니다.
2 · 관찰
『신학대전』의 둘째 길은 우리 경험 속에 작용인들의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방금 살핀 손·막대·공의 장면으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공의 움직임이 막대의 작용에 의존하고, 막대의 작용이 손의 힘에 의존하는 한 장면을 잡아 보는 것입니다.
이때 ‘손이 첫 원인이다’라고 곧장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손의 힘도 근육, 신경 작용, 에너지 공급 등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손·막대·공은 아퀴나스 논증의 결론을 보여 주는 완성된 증거가 아니라, 중간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읽기 위한 예시입니다.
그가 먼저 확보하려는 것은 단순합니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의 작용에 의존하여 실제 결과를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논증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런 관계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관찰도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아퀴나스는 어떤 것이 스스로 자신의 작용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정하는 ‘자기 원인’은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와 작용을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제공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책이 자기 자신을 인쇄했다고 말해 보겠습니다. 그 책이 책을 인쇄하려면, 인쇄하는 주체로서 이미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바로 그 책이 존재하게 된 까닭입니다. 설명해야 할 결과를 원인 자리에서 이미 사용한 셈입니다.
이 논리는 ‘사람이 스스로 공부한다’거나 ‘생물체가 스스로 몸을 움직인다’는 일상 표현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며, 자신의 활동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가 문제 삼는 것은 자기 존재나 해당 작용의 원천을 설명하면서 그 자신을 아직 설명되지 않은 원인으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단순하게 표시하면 ‘X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X 자신이며, X는 아직 그 작용을 가능하게 할 조건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설명은 순환합니다. 이 문장을 받아들이느냐도 논의할 수 있지만, 적어도 왜 아퀴나스가 자기 원인을 거부했는지는 분명해집니다.
이제 아퀴나스 논증의 핵심에 도달합니다. 설명을 위해 세 역할을 정해 봅시다. A는 다른 원인에서 힘을 받아야 작용하는 중간 원인 B를 가능하게 하고, B는 결과 C에 작용합니다.
A → B → C
화살표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이 설명에서 ‘왼쪽의 작용을 통해 오른쪽이 가능해진다’는 관계입니다. B는 단순히 A보다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니라, 현재 B가 원인으로 일하는 데 A의 작용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A의 작용을 제거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B에게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근거가 전혀 없고 오직 A에게 의존한다면 B는 C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B가 C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A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퀴나스가 사용하는 ‘앞의 원인을 제거하면 중간과 마지막 결과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A도 다른 원인 A₁에게, A₁도 A₂에게, A₂도 A₃에게 지금의 작용 능력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퀴나스는 이런 의존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어디에도 독립된 원인이 없다면, 중간 단계가 작용할 근거를 얻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과를 설명하려면 다른 원인에게서 현재의 작용 능력을 빌리지 않는 첫 작용인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여기서 검토할 대목이 있습니다. ‘의존하는 단계가 무한히 많으면 근본 원인이 반드시 없어진다’는 주장 자체가 왜 참인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모든 철학자가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무한한 원인 계열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아퀴나스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 전제를 논증의 중요한 논쟁점으로 남겨 둡니다.
이번에는 주장과 결론을 구별하여 적겠습니다. 아래의 표기는 아퀴나스 원문 그대로의 기호가 아니라, 그의 논증 구조를 살펴보기 위한 현대적인 재구성입니다.
논증의 조건부 구조를 기호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P₁ ∧ P₂ ∧ P₃) → C
여기서 P₁은 원인들의 의존 관계가 있다는 관찰, P₂는 자기 원인 배제, P₃은 근원 없는 무한 의존 계열의 불가능성이라는 전제입니다. C는 그런 계열에 첫 작용인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 식은 ‘세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이 따라온다’는 논증의 의도를 표시한 요약으로서, P₁·P₂·P₃ 자체가 참이라는 사실을 별도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실제 계열의 연결 조건을 자세히 정식화하기 전에는 완결된 술어논리 증명식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고리는 P₃입니다. ‘무한한 의존만으로는 작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이를 빼고 ‘어떤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관찰만 남기면 첫 작용인의 존재는 도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명확히 알아야 논증에 동의하는 입장과 반론하는 입장 모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둘째 길의 마지막에서 첫 작용인을 인정해야 하며, 사람들이 이를 신이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그의 신학적 연구 목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까지의 논증이 전지성, 전능성, 선함, 인격성 같은 모든 신적 속성을 한꺼번에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첫 작용인이 하나만 존재한다는 결론조차 이 짧은 논증의 전제들만으로 충분히 설명되는지 추가 논의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신학대전』의 이후 문항들은 신의 단순성, 완전성, 선함, 무한성 등을 별도로 다룹니다. 둘째 길이 직접 겨냥하는 것은 인과 의존의 질서와 그 근원입니다. 독자는 ‘첫 작용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의 설득력과 ‘그 원인이 기독교 신에 해당한다’는 동일시를 구별해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독자는 이 논증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이성적 설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논증에 회의적인 독자는 어떤 전제가 더 정당화되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논증 자체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정확하게 읽는 일이 먼저입니다.
아퀴나스의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다른 원인을 가진다’가 아닙니다. 그는 다른 데서 작용 능력을 받아야 하는 원인들의 계열을 탐구하며, 그 계열을 설명할 때 독립된 근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 예외 없이 원인이 있다’고 그의 전제를 바꿔 버리면 원래 논증과 다른 주장을 반박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독립된 근원이 실제로 가능한지, 그런 근원을 왜 신이라 불러야 하는지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을 묻는 반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둘째 길의 핵심은 가장 오래된 사건을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아퀴나스는 세계가 시간적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철학적 증명으로 확정할 수 없다고 따로 썼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건이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해도, 지금의 의존 관계에 첫 근원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남습니다. 반대로 지금의 의존 관계에 첫 근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우주가 특정 날짜에 시작했다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P₃에 대한 핵심 반론입니다. 아퀴나스는 작용을 빌려 전달하는 원인들만으로는 작용의 근원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반론자는 무한한 연결 전체에 대해 별도의 첫 항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은 원인 계열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전체의 근거가 있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히 ‘무한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느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종류의 원인 관계가 문제인지, 무한한 의존이 왜 불가능하거나 가능한지 따로 논증해야 합니다.
A가 B의 원인이고 B가 A의 원인이라는 순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상호작용이나 되먹임 현상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배제하려는 것은 해당 작용을 가능하게 할 독립된 근거 없이 서로의 작용 능력을 먼저 빌려야만 한다고 설명하는 근본적 순환입니다. 그런 순환이 가능한지, 복잡한 물리적 되먹임과 어떻게 다른지는 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단순한 고리 그림 한 개로 논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현대 우주론은 우주의 초기 상태, 팽창, 물리 법칙과 관련한 자료를 연구합니다. 이 연구는 중요한 경험적 정보를 주지만, 아퀴나스의 둘째 길이 요구하는 ‘현재의 인과 의존 전체를 떠받치는 근원’이라는 철학적 질문과 조사 대상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습니다. 우주의 과거를 설명하는 과학 모형을 첫 작용인 존재의 확정적인 증거로 쓰거나, 그 모형 하나만으로 철학적 논증을 끝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본 손·막대·공의 사례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손은 막대에 힘을 전달하고, 막대는 공에 힘을 전달합니다. 이제 막대에 고무줄을 걸어 미리 당겨 두었다가 손을 놓아도 막대가 공을 밀도록 상황을 바꿔 봅시다. 손의 현재 작용이 없어도 공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길까요?
처음 사례에서는 막대가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손의 현재 작용에 의존하도록 조건을 정했습니다. 뒤의 사례에서는 고무줄에 저장된 에너지가 새로운 작용 조건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무엇에 의존하는지 밝히지 않으면 ‘첫 원인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원인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을 읽은 뒤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세요. 아퀴나스가 찾는 ‘첫째’는 시간표에서 첫날일까요, 아니면 작용이 성립하는 데 필요한 근원일까요? 그리고 그 근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그의 전제에 동의하시나요?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를 무한 의존에 관한 P₃과 연결해 설명할 수 있다면 논증의 핵심을 이해한 것입니다.
아퀴나스의 둘째 길은 경험 세계의 원인 관계에서 출발하여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묻습니다. 원인이 다른 원인에게 의존하며 작용한다는 관찰, 자기 원인을 허용하지 않는 원칙, 근원 없는 무한 의존 계열은 현재의 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전제를 결합해 첫 작용인의 존재를 주장합니다.
이 논증의 가치는 결론에 동의하는 경우에만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원인을 하나 더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지, 원인들이 작용할 근거까지 설명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동시에 무한 의존을 배제하는 전제가 정당한지, 첫 작용인을 신과 연결하는 데 추가로 무엇이 필요한지도 묻게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적 증명은 끝난 문답이 아니라 검토할 수 있는 논증으로 남습니다.
편집 참고: 이 글에 사용한 전등·공·막대·고무줄 사례는 원문에 등장하는 실험이라는 뜻이 아니라, 논증의 의존 관계와 반론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 구성한 교육용 예시입니다. 기호 P₁·P₂·P₃ 및 C 역시 원전 기호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